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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집단등교와 마을대항 소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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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20-07-27 16:31:52 글쓴이 김재진 조회수 208
    ☆1960년대 집단 등교와 마을 대항 소운동회☆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나는 이따금 눈을 감고 유년기의 생각에 잠길 때면 항상 고향집과 큰게의 바닷가 마을회관 앞 삼판과 축항의 고향마을이 떠오른다.


    겨울철엔 논바닥에서 설매를 타거나 산에 땔감을 구하러 다녔으며 봄가을엔 냇가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여름엔 바닷가에서 멱감고 놀았던 유년기의 추억들이 흐릿한 흑백사진 위에 느릿느릿한 속도로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변변한 수영 팬티 하나를 제대로 못 갖추었던 우리들은 여름엔 고추를 내어놓고 맨몸으로 구만일동 삼판의 끝에서 다이빙하여 헤엄쳐 나오는 것이 일과였다.

    고학년이 되어선 배들을 뭍으로 올릴 때 바닥에 깔아 마찰계수를 줄여 끌여 올렸던 통나무를 엮어 만든 소라를 뗏목처럼 타고 좀 더 깊은 바다로 모험을 하며 나가기도 하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산과 들과 바다가 있었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에 정서적으로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여기에 더해 훌륭한 선배들의 지도와 친구들과 함께 했던 마을단위 자치활동의 경험은 유년기 나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1년 5월 무능했던 장면정부를 대신하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대대적인 반공 교육과 함께 4H활동을 중심으로 각 마을 단위의 농어촌 의식개혁 활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런 정부의 방침은 우리 초등학교에도 미쳐 우리가 1학년이던 1966년 5월 이상택 교장선생님은 개별 등교에서 각 마을 단위로 집단 등교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비포장의 좁은 신작로를 따라 군용 차량과 정비되지 않은 버스들이 먼지와 매연을 일으키며 다녔으므로 등교길의 안전확보는 물론 마을단위로 단결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키고자 추진하였던 것이다.


    각 마을마다 6학년을 주축으로 자치회가 구성되었는데 우리마을 구만1동에는 나의 형 김재율이 회장을 맡았다. 그는 서성조 박대진 등과 함께 우등생으로 6년간 학업성적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가을 운동회 때 소를 타고 장군 행군을 하는 등 지역사회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당시 모교에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열정적인 교사가 있었는데 국회의원 허화평의 포항고 6회 동기로서 전방부대 장교출신의 손승익 선생님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전역 후 대보초등학교에 부임해 오자 마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군대식의 강력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의 체력과 학력을 신장시켜 낙후된 대보의 교육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이런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혜택을 본 당시 6학년 선배들은 도회지 학생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포항시내 명문 중학교에 14명 전원이 합격하는 등 대보사회에 학력의 자신감을 심어 주고 상급학교 대거 진학의 물꼬를 트게 만든 대보초등 23회들이었다.


    우리마을 자치회는 김재율을 중심으로 박대진 서철복 최서환 정영태 이기옥 김화자 김금자 서순애 서은숙 서금숙 등 23회 동기들은 서로 협력하여 후배들을 지도하고 잘 이끌었다.
    각 동리바다 마을 대청소를 하고 욕표를 만들어 언어 순화운동을 하는 등 어린 우리들의 시각으로는 마치 선생님들처럼 따뜻하면서도 존경스럽고 어른스러웠다.

    당시 마을단위의 자치회를 이끌었던 기억나는 23회의 선배들로는 구만2리 서성조 이홍석, 구만1리 김재율 박대진, 대보3리 김두수 서성진, 대보2리 황성준 하철근, 대보1리 황보영진 이영국, 강사2리 서복식 김명자 등의 선배들이었다.

    당시에는 시계도 흔치 않아 먼동이 트면 아침 식사 후 습관적으로 마을회관 앞 마당에 집결하여 이런 저런 놀이를 하다 회관의 괘종시계를 보고 시간이 되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선배들의 지도하에 2열 종대로 열 지어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며 등교를 하였다.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라 책가방을 든 학생이 거의 없었고 책과 공책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둘러 매거나 여학생들은 접시를 들듯 한손으로 들고 다녔다.
    당시에는 의미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 힘차게 불렀던 군가는 월남파병 청룡부대와 맹호부대의 군가로서 지금도 흥얼거리며 부를 정도로 익숙하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월남의 하늘 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러 삼군에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
    베트남 파병은 1965년 2월 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에 이어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전투부대를 파병해 73년 철수할 때까지 31만여명이 참전했다. 8년여 동안 평균 주둔 인원은 5만명.

    1965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의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얻은 수익과 군인 노동자들이 받은 인건비 등은 7억50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 5,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1만6,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선배들이 영원히 우리곁에 든든히 있을 줄 알았는데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라며 몇번의 졸업식 노래를 부르자 1971년 봄 어느덧 우리가 6학년이 되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대보 초등학교에서는 매년 가을에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를 하였고 봄에는 개교기념으로 각 마을 대항의 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거의 매년 체육대회 행사를 앞두고 비가 내려 전교생이 바닷가의 모래를 책 보자기에 옮겨 담아와서 운동장의 물 웅덩이를 메꾸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선 급사가 학교에 나타난 뱀을 잡아먹어 우리학교엔 큰 행사를 앞두고선 꼭 비가 온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교졸업 후 상경하여 대학시절 강남이나 충청도의 친구들도 학교에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해서 한참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는 당시 육성회장이었던 소생의 부친 김만술 회장의 제안으로 구만일동 어촌계의 자금으로 50여점의 악기를 구입하여 기증하였으며 모교 최초의 고적대가 창설되었다. 김시병 선생님이 지도하였으며 초대악장에 구만일동의 윤태수가 맡아서 맹활약하였다.
    개교기념 마을 대항 체육대회에는 응원전도 치열하여 각종 응원도구들이 동원되었는데 각 부락 별 깃발을 만들어 시가 행진을 하며 학교에 모여 치열한 응원전을 펼쳤다.

    우리마을에도 한달전부터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동네 친구들 26명이 모여 장소를 숙의한 결과 우리집 작은방과 옆에 딸린 창고를 본부로 하고 매일 저녁 모여 깃발을 만드는 등 준비작업을 하였다.
    소요경비는 서보형의 춘부장 서영만 이장님이 넉넉히 쥐어 주어 도화지와 한지 크레용 물감 등 수십점을 사서 동네에서 그림을 잘 그렸던 권태화의 형 권태환과 정만득의 형 정만복에게 의뢰하였다.
    깃대는 김동록 김동철 서한균 강용도 정영철이 출장소 뒤 대나무 밭에서 베어왔다. 서미애 이해정 서귀옥 이태순 박돌선 서곡주 등 여학생들은 꽃을 만들어 가세하였다.
    장구와 징 깽과리를 다루어 본적이 없어 김창규의 부친 김만식 춘부장께서 지도를 하셨고 징잡이를 짚으로 손수 만들어 주시기도 하였다.
    행사 당일이 되어 저학년은 작은 깃발을 하나씩 들게 만들고 고학년은 큰 깃발과 함께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시가 행진을 하고 학교로 향하였다. 꽤 그럴듯한 행진이었다. 경기종목은 기마전과 육상이 중심이었다.
    다른 마을에서도 많은 준비를 하여 시가행진을 한 후 참가하였으며 육상선수들은 각 마을에서 건각들이 총 동원되었는데 당시 활약했던 기억나는 선수들은
    구만2동: 최석태 양성복 이무상 원봉순 서은숙 오근자
    구만1동: 윤태수 권태완 김창규 서미애 마영애 서곡주
    대보3동: 김동식 김달원 장두곤 남경숙 박경희 허 숙
    대보2동: 권종대 하태운 문석택 우인영 하군희 하영애
    대보1동: 장종인 문상조 이상철 김술용 강경희 김말숙
    강사2동: 황보문 정효권 정상근 이향숙 박정숙 황보선옥

    등이 마을의 명예를 걸고 뛰고 또 뛰었다.
    운동장 가장자리 이백나무 밑에선 응원전과 함께 각 마을별로 직접 만든 화려한 깃발을 흔들며 선보였는데 구만2동의 친구들은 마을 풍어제 때 사용하는 천으로 된 고기떼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나와 시선을 모았다.
    그해에는 우리마을 구만일동이 운 좋게도 우승을 하여 이용석 어촌계장님으로부터 두둑한 포상금을 받아 후배들에게 각 학년별로 나눠주고 동기들은 우리집에 모여 과자와 어른들이 끓여준 삼양 라면을 먹으며 축하모임을 가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유년기의 이런 다양한 경험은 성장기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과 리더십을 키웠으며 애향심으로 승화되어 나의 가치관을 만들었고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한 이런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179명의 동기들 중 생존하고 있는 159명의 우리 28회 동기들은 강사 2동에서 구만 2동까지 2년 단위로 각 동리별 로테이션으로 집행부를 맡아 선의의 경쟁을 해가며 졸업 후 지금까지 동기회를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정말 좋은 자연 환경속에서 너무나 훌륭한 은사님들과 선생님들과 동기들이었다.
    김재진(28회) //


    • 김정숙 2020-08-05 15:29댓글 삭제

      춥고 배고픈 시절, 그래도 좀 여유롭고 풍요로웠던 가을날의 마을잔치가
      아니었나 싶네요

    • 김재진 2020-07-27 16:44댓글 삭제

      뭐든지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이라 그랬던가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반세기전의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본다니 다소 겸연쩍어 지기도 하는군요.

      그러나 저의 졸필이 동시대를 같이 살았던 선배님들과 동기들 후배님들에게 유년기 우리 고향에서의 추억을 되살리고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 정서적으로 작은 위안이 나마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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