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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기고싶은이야기들 대보교회학교소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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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21-02-22 20:42:16 글쓴이 김재진 조회수 340

    남기고싶은이야기들

    흔히들 100세시대라고 이야기 합니다만 아직 체력과 지력이 살아있을때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우리세대의 이야기들을 수필형식으로 정리하여 28동기밴드에 시리즈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이 그 5번째로 졸필이지만 동창회 게시판에도 함께 공유합니다. 


    ☆대보교회학교소년부☆

    어머니의 노래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2002년 가을 구만일동 우리집 마당에선 작은 행사가 열렸다. 어머니의 팔순을 기념하는 소규모 잔치였다. 서울에서 꽤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그간 내가 고향자랑을 해서인지 관광을 겸해 내려와서 자리를 함께 했다. 사회를 보던 친구가 어머니께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부르시라고 권하였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찬송가 한 소절이 나지막이 어머니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장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찬송가가 후렴을 거쳐 끝날 즈음 옆에 앉아 있던 나의 누이 김여수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다 함께 눈시울을 닦았다. 어머니의 노래는 늘 찬송가와 함께 하였다. 들릴 듯 말 듯 음정과 박자가 적당히 무시된 어머니만의 노래였다.

    어머니의 신앙
    내가 초등4학년이던 47세 되던 해 어머니는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지역 유지인데다 완고하기로 소문난 김해김씨 유교 집안의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인을 모르는 잔병치레를 하다 급기야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기독교에의 입교를 허락하셨다. 당시 대보 지역사회에서 영험하기로 소문난 샤머니스트였던 대보2동 문용수의 어머니를 불러 한바탕 굿을 한 후 다음날 주일아침 앞집 김동록의 어머님 이선악 집사와 옆집 서귀옥의 부모님 서위택 김말란 집사의 권유로 대보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어려울 때 마다 서귀옥의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마음씨 착한 서귀옥은 외모나 인성이나 지금도 그녀의 부모님을 꼭 빼 닮은듯 하다. 다행이 어머니는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놀랍게도 건강을 되찾았고 신앙심이 깊어져서 대보교회 최초의 권사로 2012년 서울에서 아흔의 나이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실 정도로 택함을 받은 교인이었다.

    어머니의 편지
    1980년 5월 학생시위로 시국이 혼란스러웠을때 나는 고향에서 온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검은 가로줄이 그어진 괘지 편지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바다 보아라” 로 시작하는 살아 생전 어머니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뒤숭숭한 시국에 데모하는데 끼지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의 편지였다. 나는 정규교육을 받지못한 어머니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상경하였으나 어머니는 그간 성경읽기와 찬송가를 통해 국문을 완전히 깨우친 것이었다. 우리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농업과 어업의 고달픈 삶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통해 어떻게 국문을 깨우치고 편지까지 쓸 수 있었는지? 그날 밤 나는 맞춤법이 절반 즈음은 틀린 발음나는 대로 또박또박 쓰여진 어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수차례 꺼내 읽으며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나의 교회학교
    나는 신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의 강권으로 초등4학년때 부터 이웃의 김동록 서귀옥 이태순과 함께 교회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무신 한컬레가 소중한 시절 당시 우리들 사이에선 “예배당에 가면 눈감아라 해놓고 신 도둑질 해 가더라” 라는 얘기가 장난처럼 유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 바닥인데 번호도 칸막이도 없는 가로로 트여진 신발장이었다. 신발이래야 모두가 검정색 고무신인데 우르르 몰려 나오며 누구 신발인지 가릴 틈도 없이 적당히 신고 나오니 새신발을 신고가면 항상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점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 이었다.
    모조지에 악보도 없이 붓글씨로 가사만 쓴 차트로서 한장씩 넘겨가며 반주도 없이 불렀지만 어릴 때부터 다닌 친구들은 잘도 불렀다. 나도 적당히 따라 불렀으나 1년이 지나니 웬만큼은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김성수 손정암 홍승철 남경숙 이숙이 하경희 박경자 양선옥 등은 유치부 시절 부터 다녔으며 구만일동의 서귀옥 김동록 이태순과 고학년이 되어서는 강사의 김정규 김상길 김종하 등의 친구들도 십리길을 마다 않고 강사교회가 생길때까지 함께 다녔다. 우리는 신앙보다는 재미로 다녔지만 대보3동의 16회 강부길 강관원 두 선배님은 교회학교 6학년 교사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훗날 김창식 문병천 서신호 장로와 더불어 대보등대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나의 소년부
    중학생이 되자 우리는 자동으로 소년부에 입회하였다. 3학년에는 대보중학교 초대 학생회장이던 조창복과 김동수 백영만 하명숙 김여수 2학년엔 양성노 김창달 김동석 등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면서 학생회 집행부를 맡아 봉사하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인성교육과 함께 회의의 진행방법 등에 미숙한 우리들에게 모임의 민주적인 운영방법에 대해 지도해 주었다. 어느덧 우리가 3학년이 되자 소년부 회장 투표에서 대보3동 이발소 김이호 장로님의 아들인 김성수가 되리라고 예측하였으나 후배들이 밀었는지 예기치 않게 내가 회장으로 당선되어 부회장에 김성수 서기에는 홍승철이 함께 활동을 하였다. 지금도 교회에서 강냉이 박상을 막으며 김성수와 풍금을 치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 선거 출마자가 없자 김성수를 회장으로 나와 우인영을 부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우인영은 당시에도 봉사정신이 투철하여 소풍 전날 그녀의 대보2동 집에 모여서 여학생들이 선생님들의 도시락용 김밥을 만들던 추억이 지금도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와 학교에서 서로 도와가며 공부도 하고 소년부도 재미있게 운영하여 후배들도 많이 증가하였다. 이런 활동들은 초등학교 때 까지 소심하였던 나에게 리더십을 키워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스터디 그룹
    중학교는 대보2동 등댓거리의 허허벌판에 세워졌다. 신작로를 따라 걷던 우리는 비만 오면 군용차량과 버스가 튀기고 간 흙탕물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교회친구인 대보3동 손정암은 부친이 소장수에다 모친이 두부를 만들어 팔아 조피쟁이라고 불리었으나 천성이 착하고 비교적 풍족한 환경이었다. 그의 누나들이 나를 아껴줘서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도중 항상 그의 집에 들려 순두부를 얻어 먹고 김성수와 함께 교회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초여름 즈음엔 대보2동의 하재활이 나에게 불현듯 제안을 하여 왔다. 고교입시를 준비하여야 하니 넷이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성격이 급하지는 않으나 첫음을 뗄 때 말을 더듬어 항상 우리를 웃겨 주었다. 그래서 대보2동 그의 집 사랑채에서 밤늦도록 함께 공부하였다. 그의 집 대문입구에는 하태운 하군희 하경희 하영애 하청자 등 대보2동의 훌륭한 동기들을 배출한 명문 진양하씨네 집성촌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어 밤늦게는 무서워서 혼자 나오지 못하였다. 대나무 울타리와 기왓집 사당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는 공포 그자체였다. 졸업이 가까워 오자 나는 형들의 권유로 포항고로 진학했고 손정암은 함께 지원하였으나 뜻을 못이루었고 김성수는 하재활과 함께 포항공고에 진학하였다.

    인생무상
    고교때부터 진로가 달라진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였다. 학부시절 한해 여름방학때 내려오니 김성수는 당시 대보교회 정진락 목사님의 아들인 정연동과 함께 어울리며 대구의 영남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젊은시절 적잖은 방황을 한 그였기에 나는 용기를 북돋어 주었으며 훌륭한 목사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40대초반 너무나 젊은 나이에 운명하고 말았다. 하재활도 공고에 진학하였으나 기술자의 길을 걷지 못하고 보험업계에에 투신하여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2018년 운명하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건 2011년 강남에서 재경 동기들 송년모임에서 였으나 이후 긴 투병생활로 대면하지 못하였다. 소년시절 함께 공부하며 꿈과 희망을 공유하였던 너무나 훌륭한 아까운 두 친구였기에 그들을 일찍 보낸것이 아쉽기만 하다.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그들이 못다한 삶의 영역까지 하루 하루를 더욱 충실하게 살다 올 것을 부르짖고 있는것만 같아 오늘도 삶의 자세를 가다듬곤 한다.

    김재진(28회)//


    대보교회학교 당시 28회 졸업생 12명
    가운데줄 왼쪽부터 양선옥 최연옥 서귀옥
    중앙부터 이태순 남경숙 이숙이 박경자
    아랫줄 왼쪽부터 김성수 손정암 서동웅 김재진 홍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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