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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풍년의 기억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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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21-11-02 11:47:50 글쓴이 김재진 조회수 145

    오징어 풍년의 기억 소환


    요즘 우리고향 호미곶에서 오징어가 풍년이라는 소식이 들려와서 너무 흐뭇하다. 우리는 태어나서 오징어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20~30년대 생으로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 부모님들은 표준어인 오징어 보다는 "이까" 라는 일본어를 더 친숙하게 사용했다. 한여름밤 수평선엔 항상 오징어배들의 불빛들로 수를 놓았었다.



    오징어 하면 항상 생각나는건 1969년 초등 3학년때 "이까바리"를 하러 동네 삼판을 떠났던 "공영호"가 떠오른다. 이까바리는 오징어잡이를 이르는 일본어이다. 강원도 선적의 당시로선 초대형 목선이었는데 우리동네의 형들을 싹쓸이 하듯 싣고 대보항 내항을 몇바퀴 돌고 나갈땐 전장으로 나가는 용사들을 배웅하듯 동네에서 큰북을 치며 환송해 주었다. 


    이까바리는 농경사회에서 농사와 어업 이외엔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마을의 청년들에겐 몇달간 현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구만1리 김만오 작은 아버지가 선장이셨는데 고구마를 다라이에 이고 와서 자기 아들이 이까바리 배를 타게 해 달라고 로비를 할 정도였다.



    당시엔 영농도 인력에 의존하였지만 어업도 기계화가 진전되지 않아 개인별로 갑판의 가장자리에 줄지어 앉아 낚싯줄이 감긴 물레를 손으로 돌려가며 풀었다 감았다를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금년에 세상을 떠난 나의형 재대 형님(19회)도 그배를 타고 주문진으로 떠났었는데 몇달 후 돌아올때 당시엔 귀했던 아동용 장화를 사왔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오징어 잡이는 야간작업 이므로 대낮같이 환한 집어등 밑에서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형들은 초저녁엔 집중하지만 오징어떼는 오지 않고 쏱아지는 잠을 지체할 수 없어 잠시 눈 붙이고 나면 주위의 중년들은 떼를 만나 이미 한가득 잡은 뒤여서 어획량이 뒤쳐질 수 밖엔 없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 세대의 형들은 이후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1970년대엔 썰물처럼 도회지로 빠져나가 제조업의 근로자들로 도시민이 되었고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아낙네들은 오징어 건조를 하였다. 냉동시설이 흔치 않았기에 건조를 하여 장기간 보관도 하고 원거리까지 유통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선 식구들이 많았고 바닷바람을 이용하기 쉬운 부락케 김동철(28회)네 집에서 가장 대규모로 하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오징어 건조 덕장을 지나치며 가장 긴 다리는 표시가 나므로 중간다리를 하나씩 어른들 모르게 드문 드문 떼어 먹곤 했었다. 건조가 완전히 되기전 꾸들꾸들한 상태의 오징어를 머리를 고정하고 양손으로 몸통을 잡아당겨 평탄하고 넓게 펴서 완성을 시키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징어는 어떤 형태로 먹어도 맛있지만 비린내가 없는 오징어회는 단연 최고의 물횟감이다. 또한 적당히 발효시킨 오징어를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잘 무친 젓갈은 언제나 식욕을 북돋운다. 가끔씩 고향에 갈때마다 이웃에서 건조한 오징어를 몇마리씩 갖다 주었는데 그 중 오징어 배를 타던 김원태 형님(16회)이 배에서 건조시켰다는 이른바 "배오징어" 가 가장 맛있었다. 


    잡자 말자 신선한 상태에서 바로 건조시켜서 일까? 아니면 한바다 해풍의 염분을 적당히 베여가며 건조시켜서 일까? 부드러운 식감의 반건조 오징어인 "피데기"는 서울의 우리 친구들에겐 최고의 맥주안주이기도 하다.



    1998년 가을 어느날 고향에 와 보니 그해에도 오징어가 풍년이었다. 어머님은 칠순이 넘어서도 오징어 풍년일 때는 몇상자씩 사서 건조시켜 서울의 회사 직원들에게 팔아 달라고 상경하는 내차의 드렁크와 뒷좌석 가득 실어 주었다. 마지못해 팔아 드렸지만 구입원가와 판매가를 따져보면 한축에 5천원에서 만원정도의 부가가치 였다. 


    매월 용돈을 부족하지 않게 보내 드렸건만 왜 이런일을 하는지 대기업에서 큰 비즈니스를 하던 당시의 나로서는 어머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금액의 대소에 관계없이 자신이 노동을 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돈을 번다는 노인들의 소박한 기쁨을 환갑이 지난 이제서야 이해하였으니 불혹의 나이에도 철없었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무쪼록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기에 오징어로 하여금 우리고향의 지역 경제가 되살아 나고 활성화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재진(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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