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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호미곶 제주 해녀 정착기 (삼춘 어디 감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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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22-03-23 10:03:10 글쓴이 김재진 조회수 288


    포항 호미곶 제주 해녀 정착기 (삼춘 어디 감수광..)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해녀와 함께 생활해 왔다.
    해녀의 사전적 의미는 바닷속에 산소공급 장치 없이 수심 1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소라·전복·미역·톳·우뭇가사리·성게·운단 등을 채취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을 칭한다.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분포되어 있으나 제주도가 원조로서 한반도 각 해안과 여러 섬에 흩어져 있으며 현재는 젊은이들의 기피로 인해 대부분 고령자들로 국내에는 약 2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우리고향 호미곶에 정착한 해녀들은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고 있어서 물질만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농사일을 치르는 사이에 물때에 맞추어 바다로 나가 물질을 하므로 이들의 밭은 뭍과 바다에 걸쳐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해녀들은 밭일과 물질을 한나절 씩 하는 경우가 흔하며 해녀작업은 봄에서 가을까지 특히 한여름철에 성행하였지만 추운 겨울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들도 많다. 해녀들은 해산물의 채취능력이나 기량에 따라 내부적으로 자연스럽게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고향에 있어 해녀의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한동네에 한두 명 정도의 해녀가 제주도에서 와서 정착하여 살았었는데 5.16군사혁명시 해병대 중령으로 혁명주체 세력으로 참여하여 전매청장을 지낸 좌병욱(바우)의 모친인 고사문이 대표적인 1세대의 상군 해녀이다.



    당시만 해도 금융기관이 없었고 좀도둑이 극성이어서 물질로 번 현금을 맡길 데가 없어 눈에 띄지 않는 부엌 아궁이의 잿더미속에 감추었다 깜박 잊고 불을 지펴 돈을 다 태워 먹은 일화는 유명하다. 고사문은 교육열이 대단하여 외아들을 포항고에 진학시켜 간부후보를 거쳐 해병대 장교로서 군사혁명에 가담하였는데 그는 출세후에도 기회 닿을 때 마다 우리고향 큰게 앞바다에 와서 슬피 울며 어머니에 대한 모정을 달래곤 하였다.



    우리 고향에서 조직적으로 해녀 인솔사업이 본격화 된 것은 1960년부터 였다. 이전에 개인적으로 들어와 정착한 분들이 해녀 1세대라면 육지에서 제주도에 들어가 선금을 주고 스카우트하는 형식으로 1960년이후 1970년까지 들어온 해녀들은 2세대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천초와 전복과 운단을 주로 채취하였다.

    2세대 해녀들은 김부자 서유순 좌창연 좌창주 홍남진 배선자 강영희 등의 상군 들이었다. 당시 제주항에서 도라지호로 꼬박 이틀 뱃길로 부산항으로 와서 다시 버스로 하루꼬박 걸려 호미곶으로 오던 시절이었으니 실로 대단한 여정이었다. 이들 중 강영희는 남제주 표선면 출신으로 수영 제주도 대표선수를 역임한 팔등신 미녀로서 상군 중의 상군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현재는 경남 남해에서 정착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우리고향 동리의 각 가정에 셋방을 얻어 삼삼오오 함께 생활을 해 가며 봄 여름 한철 벌어 제주도로 귀향하였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물질을 오래 할 수 없었다. 뭍에 나오자 마자 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야 했었다. 지금도 어렸을 때 물질을 하러 태왁을 이고 가던 긴 해녀들의 행렬이 생각이 난다.



    해녀들은 바닷속에 무자맥질하여 보통 수심 5m에서 30초쯤 작업하다가 물 위에 뜨곤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수심 20m까지 들어가고 2분 이상 물 속에서 견디기도 하였다. 물 위에 솟을 때마다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막혔던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이색적인데 우리 어릴적엔 한여름 부느리께와 까꾸리께 큰게 한내의 앞바다에는 여기저기서 울러나는 이 숨비소리로 활기가 넘쳐났다.



    해녀들은 간편하게 마련된 탈의장이나 바위 틈에서 ‘물옷’이라는 해녀복으로 갈아입고 ‘눈’이라고 하는 물안경을 꼈었다. 해녀들이 부력을 이용하여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테왁’ 은 박을 건조하여 만들었으며 그 밑에는 채취물을 담는 자루 모양의 망시리가 달려 있었다. 해녀들이 무자맥질할 때에는 이 ‘테왁’과 ‘망시리’를 물 위에 띄워두고 한가득 차면 뭍으로 걸어 나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고향의 3세대 해녀들은 일본에서 고무 옷이 개발되어 우리나라에도 전래된 1970년 이후에 들어온 분들이었다. 고무 옷으로 인해 보온성이 확보되어 바다에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겨울철에도 물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우리고향의 3세대 해녀들은 고성순 백선자 이순자 김순아 김옥선 양순선 김춘희 양매선 고명숙 홍영대 홍명대 등의 상군들이었다. 특히 홍명대는 제주도 안의 또다른 섬인 우도(소섬) 출신으로서 상군 중의 상군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고향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 후 정착하기도 하였다.

    음력으로 칠월칠석 날은 모두가 물질을 중지하고 호미곶 등대 밑으로 소풍을 가서 미리 채취한 홍합으로 다시물을 내고 국수를 조리해서 먹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타향에서의 향수를 달랬던 모습들이 바로 어제의 일로 느껴진다.



    우리 부모님들은 조직적인 해녀인솔이 이루어지기 전인 1960년 이전에 개인적으로 들어와 정착한 1세대 해녀들로서 멀리 제주에서 개별적으로 도다이에 가면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리길을 마다 않고 와서 정착한 개척자 들이었다. 생활력이 강하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유난히 투철하였던 그녀들로 인해 오늘의 우리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황영조도 제주도 한림읍 협재 출신의 해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어렵고 힘들때 마다 물속에서 잠수하며 모질게도 숨을 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난관을 이겨 내었다고 한다.



    우리 28회 동기들 중에 외가를 제주에 둔 친구들은 고성분 강용도 황종대 우인영 강재옥 김재진 이인숙 등으로 1920~60년대 부모님 세대가 우리고향에 정착후 이젠 대부분 돌아가시고 육신을 이땅에 묻었지만 어려서 부터 제주도에 대한 향수와 삶의 자세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시고 가셨기에 우린 그분들의 강한 생활력과 근검절약 정신을 오늘도 계승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경상북도는 지난해 해녀 문화 전승·보전에 관한 조례를 만든데 이어 올해부터 이 조례를 바탕으로 해녀 어업 보전 및 육성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기로 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고향 호미반도를 중심으로 해녀들의 생활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해녀의 역사, 문화, 생활양식, 음식문화 등을 발굴하고 수산물 직판장, 해녀 체험 교실, 해녀 작업장·휴게실 등을 갖춘 해녀 복지 비즈니스 타운을 건립해 해녀의 삶과 관광을 연계한 문화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수산 창업지원센터가 오는 7월 문을 열면 해녀 교실도 개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각종 복지사업을 마련·지원하기 위해 해녀증을 발급하고 제주도와 울릉도 해녀 교류사 재조명 사업 등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의 해녀 수는 1천370명으로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으므로 경상북도는 지역 해녀 어업을 보전하고 문화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녀문화 전승보전 위원회를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소직이 개인적으로 수차 관직에 있는 친구들과 관계 요로에 제안해 왔던 사업들이 이제야 현실화 되니 다소 때늦은 감은 있지만 고향발전을 위해 기여한것 같아 보람을 느끼고 너무 기쁘다. 


    우리고향 호미곶에 제주도 해녀가 이주하여 정착한지 어언 100년.. 

    아무쪼록 우리들의 정신적인 모태이자 우리 고향의 큰 문화적 자산인 해녀들로 인해 지역경제가 활성화 되고 또하나의 관광테마로서 호미곶이 크게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재진(대보초등 28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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